
같은 학년에 수시로 무단 결석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
내 반 학생은 아니었지만 지난 해부터 학교에서 <끔쪽이>로 꽤 알려진 학생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작년에도 종종 이 학생 때문에 교감선생님이 그 반 교실을 자주 들락날락 했었다.
그 학생은 담임교사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고 그 수준이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수업 중 교실 전등을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한다던지…
교사가 말하는 중간중간 껴들어 다른 친구들을 지적질 한다던지…
그 교실에서는 수시로 선생님의 큰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 아이의 그런 류의 행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교감선생님이 그 아이를 교무실 내의 성찰실로 데러가기에 이르렀는데 그 일이 있은 후의 아이는 행동이 개선되기는 커녕 반응이 더욱 가관이었다.
“교감선생님하고 성찰실에 있으면 오히려 편해! 나도 좋아!”
담임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한 대선배셨는데 그 아이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매일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계셨다.
어쨌든 한 해를 그렇게 겨우겨우 넘기게 되었다.
이어 다음 해에 그 학생의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경력이 수년차인 팔팔한 여선생님이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해당 학생이 학기 초에는 작년보다는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여전히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크게 피해가 가는 행위는 전과 달리 적절히 통제되는 것 같았다.
동료교사들도 이에 대해 크게 안도했다.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여선생님이 이 학생으로 인해 한 해가 아주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 아이의 문제는 이제 다른 데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 학생이 학교를 안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엄마는 처음에는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를 대더니 점차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싫어한다고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프면 이는 정당한 질병에 의한 결석이 된다. 그러나 학교가 가기 싫다고 오지 않는 것은 정당한 결석의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무단 결석에 해당한다.
아이는 2일 연속 결석을 하고 다음날 학교에 나오는 식이었는데 중간에 한 번씩 학교를 나온 날도 얼마 안 있다 바로 조퇴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 연속되는 상황을 해당 반 담임선생님에게 전해 듣게 되었는데 내가 처음에 이해가 안되었던 것은 그 부모의 포지션이었다.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싫어한다고 해서 학교에 안보내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다. 부모라면 이유 없는 결석을 하려는 자녀를 어떻게든 학교로 보내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부모는 아이가 그런 식으로 결석하는 습관을 개선하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 보였다.
결국 이 아이는 그런 식으로 결석을 일삼다가 3일이 넘는 결석을 하게 되었고 담임선생님은 결국은 가정방문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아이를 직접 만나 소재와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가정방문에 나도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아이가 살고 있는 해당 아파트를 방문하여 현관문이 열렸을 때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집에는 아이 뿐만 아니라 아이엄마가 같이 있었던 것이다.
보통은 아이가 습관적인 무단결석을 하는 경우 부모가 맞벌이부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것을 직접 관리하지 못해 결석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잦은 무단 결석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집에 있으면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이다.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부모는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닌 못한 것이다.)
놀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이에게 미소를 살짝 지어보이곤 말했다.
“건강해보이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엄마가 말했다.
“죄송한 줄 알아야 돼. 너 때문에 선생님들이 직접 집까지 오시게 됐잖아.”
아이엄마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무안한 듯 말했다.
그리고 아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는데 아이의 표정이 다소 가관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지만 엄마를 잡아먹을듯한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표정은 엄마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입 다물어!
그 때서야 나는 이 학생의 문제행동의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집에서 아이는 엄마를 자신보다 낮은 서열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오랜된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아이에게 약간의 협박을 해보기로 했다.
“선생님, 지금 00은 출석일수가 유급이 될 수도 있는 수준이 아닌가요?”
그랬더니 내 의도를 눈치 챈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답했다.
“네, 결석일수가 지금 거의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앞으로 며칠 더 결석하게 되면 유급이 될 수도 있어요.”
아이의 엄마도 여기에 맞장구를 치며 한 마디 말을 더 보탰다.
“아유, 제가 몇 번을 말했는지 몰라요, 선생님. 그러다가 학교 1년 더 다녀야 된다고…그렇게 이야기를 해 들은 체 만 체 예요.”
다시 아이가 엄마를 노려보았고 엄마는 고개를 숙이며 아이의 눈을 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속으로 한 숨이 나왔지만 나는 아이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아. 한 살 어린 동생들하고 같은 교실에서 정말 잘 지낼 수 있겠어? 힘들겠지만 학교에 나오려고 노력해 봐.”
아이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아이가 너무나도 안전하게 있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한 셈이므로 우리의 역할은 끝난 셈이었다. 이젠 아이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고쳐먹고 다시 학교에 오길 바라는 수 밖에…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의 담임교사에게 듣자하니 아이가 자주 결석하는 원인이 교우관계인 것 같다고 한다.
함께 노는 여자들의 무리에서 최근 본의 아니게 빠지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과 마주치기 싫다는 말을 학부모에게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나오더라도 급식실에서 마주치게 될 그 아이들이 보기 싫어 학교에 오더라도 점심을 먹지 않고 서둘러 조퇴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아이가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분명 아이에게 사랑을 뜸뿍 주었을 친절한 엄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엄마는 되지 못했다.
이 아이의 사회성은 이미 위험한 수준에 와 있다. 그런데 이제는 문제가 생긴 친구들과 대면하기조차 꺼리고 있다. 이렇게 문제를 피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바람직한 관계를 맺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조차 없게 된다.
이 아이가 문제에 똑바로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한데 아이에게 휘둘리는 부모가 이를 해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결국은 아이는 사회성 부분에서 앞으로 더욱 더디게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부모가 아이에게 통제력을 상실하는 순간 되돌이킬 수 없는 수순을 밟게 된다.
더욱이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스스로 감정을 절제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가족에 의한 최소한의 통제조차 되지 않는다면 잘못된 길로 의도치 않게 나아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며 배운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정착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권위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부모로서 보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분위기 변화의 영향도 크지만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큰 나머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배려에 아이가 익숨해짐으로써 부모를 자연스럽게 얕보게 되기도 한다.
아이에게 내가 받지 못한 사랑과 존중을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은 좋은 부모가 되는 길도 아니며 아이를 위한 길도 아니다. 부모라면 때때로 아이가 바람직하지 않은 언행을 할 때 그 순간엔 마음이 좀 아프더라도 아이를 강하게 질책하고 훈육하고 적절한 행동 수정을 엄정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아이가 앞으로 올바르게 성장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를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는 부모들을 종종 본다.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사랑을 바탕으로 육아에 임하되 아이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바로잡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 그럼으로서 부모의 권위가 유지되고 아이가 부모를 부모로서 존중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