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이순신 수업참고자료 정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발발 전 일본과 조선의 상황과 이순신 그리고 명량대첩의 주요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의 상황

당시 조선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혼란, 일본 답사를 떠난 김성일과 황윤길의 일본의 침략의도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 외에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일본에 밀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더 있다.

조선은 16세기부터 군사력이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약 200년간 이어진 평화가 조선의 군사력에는 독이 되었다. 16세기의 조선은 군역이 문란해져 군사조직체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심지어는 군역을 군포제로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징병체제가 무너졌고 이로 인해 병력은 갈수록 부족해지는 상황이었다.

또 이 때의 조선은 문관 출신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지휘통솔 하도록 하였는데 이것도 군사력이 약화된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대규모의 왜구가 조선을 칩입한 을묘왜란이 1555년에 일어났는데 약해질대로 약해진 군사력으로 제대로 대응이 어려웠던 조선은 병력을 전시에 집중하는 방식인 제승방략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 체제는 각 진의 수령들이 병력을 이끌고 본진을 떠나 특정 전장지점으로 모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아 대응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이는 전투가 일어난 지역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한 번 방어선이 뚫리면 속수무책으로 적의 진격을 허용해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일본의 상황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 100여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로 마무리 한 상황이었다. 지난 전국시대의 수많은 전투로 인해 이들의 실전 전투 경험은 조선과는 정반대였다. 도요토미는 전국을 통일했지만 여전히 힘이 강성한 지방의 다이묘들을 견제하고 반란을 사전에 막기 위해 대륙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승려로 위장한 정탐꾼으로 조선의 정세와 지리 정보를 미리 수집하였고,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해 개량한 조총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차근차근 전쟁 준비를 모두 마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조공요구와 함께 명을 치러 가려하니 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시작으로 1592년 4월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부산진 동래성을 시작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이순신

1545년 서울의 빈곤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1576년 병과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함경도 일대에서 근무했다. 1589년 정읍 현감이던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왜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원균과 윤두수 등 일부 서인세력의 모함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으나 다대포 칠천량에서 계속해서 패배하여 다수의 장병들과 전선을 잃고 결국 제해권을 상실했다. 이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복귀시켰다. 선조는 육군으로 합류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이에 대해 이순신이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로 시작하는 장계를 올리게 된다.

이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명량 해전

한편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진격하여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이들도 알고 있었으나 남은 전선이 13척이라는 것을 알아챈 일본 수군은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무력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지난 칠천량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일본군의 사기가 드높여진 것도 한 몫을 했다.

일본 수군의 기동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량대첩 전날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 말을 언급하며 그 유명한 결의를 하게된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 때가 12척의 판옥선과 군사 120명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1597년 8월 333척의 왜선을 맞아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 직전이었다.

명량해협은 울돌목이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진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이었다. 이 조류의 속도는 세계에서 5번째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울돌목에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암초가 있어 소용돌이 치는 물살이 특징인 곳이었다.

10월 25일 130여척의 일본 세키부네(일본 전선)는 명량해협으로 진입한다. 당시 일본 수군이 명량해협에 도달했을 때에는 조류가 순류 방향이었기에 일본수군은 전투에서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수군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이순신은 즉각 울돌목에 전선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적선의 엄청난 숫자에 조선 수군은 겁을 먹은 나머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기함은 자리를 지키며 40분간 전투를 홀로 하며 버티게 되는데 이것이 영화 명량에서의 첫 전투 장면이다.

이후 소강상태가 되자 이순신 휘하의 전선들이 전투에 복귀하기 시작한다. 이어 계속된 전투 중 적장 구루시마는 함포사격에 의해 전선이 침몰되어 바다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끌어올려 목을 친다. (이는 영화 ‘명량’의 장면과는 다소 다르다) 지휘관이 참수된 것을 목격한 일본수군은 급격하게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즈음 조류의 방향이 반대로 흐르기 시작하였고 그 유명한 판옥선의 당파(적선을 부딪힘으로써 타격을 입히는 것)전술이 시작된다.

태생적으로 선회하는데 많은 공간을 필요하는 일본 전선들은 선회하여 후퇴하기 어려웠다. 일본 수군은 조류가 역류상태로 변하자 우왕좌왕 자신들끼리 충돌하였고 조선 판옥선의 당파전술에 전혀 반격할 수 없었다.

전투는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진 틈에 잔존했던 일본 수군 약 10여척이 철수하면서 종결되었다. 일본 수군 330여척 중 320여척은 침몰하거나 대파되었으나 조선의 전선은 단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다.

이 전투로 당시 일본 수군의 군감이었던 모리다카마시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리 총사령관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당시 조선수군은 백병전은 불리하였으나 함포 적재량이 일본수군에 비해 월등했을 뿐만 아니라 함포 사용에 익숙했다. 반면 일본군도 함포가 있었지만 사용에 서툴렀다. 판옥선이 일본 전선보다 훨씬 견고했던 점이 당파등에서 보다 유리했던 점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 명량해전은 세계사에 기록될만큼 대단한 해전으로 평가되며 이순신을 세계적인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전투이기도 하다. 이 명량해전을 계기로 조선은 정유재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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